20220203 / 단 9:16-19 / 이스라엘 회복을 간구함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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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회복을 간구함

단 9:16-19

16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단 9:16-19 / 하나님, 주께서는 지난날 우리를 늘 지키셨지요. 하오니 예루살렘을 돌아보시어 더 이상 화내지 마소서. 예루살렘은 주님의 도성이 아닌지요. 주님의 거룩한 산이 아닌지요. 우리 이웃에 사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깔봅니다. 주님의 백성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이지요.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지요. 17) 하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렇게 비오니 들어주소서. 이렇듯 파괴되어 있는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소서. 어여삐 굽어보소서. 주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사람마다 분명히 알게 하소서. 그리하도록 예루살렘을 다시 세워 주소서. 18) 나의 하나님, 나의 호소를 들으시고 내게서 떠나지 마소서. 우리를 굽어보소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을 한번만 돌아보소서. 주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얼마나 처량한가를 굽어보소서. 우리에게는 이제 아무 공로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크신 긍휼을 의지합니다. 19) 여호와여, 우리가 비는 것을 들어주소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지금 들어주소서. 하여 사람마다 주님이야말로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모두 다 알게 하소서. 깨닫게 하소서. 지체치 마소서. 이 도성 예루살렘이, 이 백성이 모두 다 주님의 것이 아닙니까?'

9장에 있는 다니엘의 기도는 중보기도의 전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도 중에 하나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기도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심장에 꽂히는 언어로 기도합니다.

주의 분노를 떠나게 하옵소서(16-17) 다니엘은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거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기도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위에 있는 민족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달라고 구합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단순히 죄로 인한 고통과 수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드러나기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18) 다니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근거는 언약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 또한 그 백성에게 베푸시는 그분의 인자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여 주여 주여(19) 회복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는 본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의 ‘주여!’가 세 번 반복됩니다. 이는 다니엘의 간절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체하지 마시고 속히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당신의 기도 응답을 위해 지금 간절히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까?

적용: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능력을 믿을 때 성도는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범죄 사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죄를 짓고 행복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죄의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지은 후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입니다. 그 해결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으니 오늘 그것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단 9:16-19 / 김지철 목사

많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대한민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50년, 100년 전만 해도 어떠했습니까? 대한민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가 있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국권을 잃어버렸던 시기에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의 이름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6.25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나라를 위해 꽃다운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참전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유신과 군사독재 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민주유공자들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필리핀보다도 경제 환경이 열악했던 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 땅에 경제적 풍요와 번영을 위해 수고한 산업근로자들과 기업가들, 경제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어두움의 땅에 빛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 때까지 복음 때문에 생명을 드린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의 충성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마음 놓고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전쟁의 위협에서부터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재조명해 보면,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와 위기가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크게 세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첫째는 지금도 전쟁의 위협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해방 이후 분단된 상태 속에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고, 핵전쟁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반복된 공갈과 위협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너무 자주 있다 보니 우리는 그것을 심상히 여기고 있지만, 사실 한반도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이 최근에 겪었던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바로 6.25전쟁일 것입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부동 전투에서 숨진 한 학도병이 있습니다. 다부동은 대구 북쪽 22km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습니다. ‘우근’이라는 15, 16세 밖에 안 되었던 이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그는 어머니를 부르며 편지를 썼지만, 이것은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었습니다.

6.25전쟁의 전사자가 무려 150만 명이 넘습니다. 부상자는 350만 명입니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3천만 명이라고 하면 전체 인구의 약 1/6이 신체적 손상을 입고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산업시설 및 공공시설은 다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자식을 잃어버린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 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족을 잃은 분들의 부르짖음과 외침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리게 되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대한민국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통일과 민주통일, 평화통일을 위해서 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이 줄어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당면 위기는, 갈등과 다툼이 첨예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말합니다. “얘야, 안보가 먼저지, 경제 성장이 먼저지.” 그러나 자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가 먼저예요. 복지가 먼저예요.” 이 나라의 정치, 사회적인 문제만으로도 부모와 자녀들은 이렇게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의견의 차이를 줄일 수 있고, 또 만날 지점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갈등은 이념적인 갈등입니다. 소위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있는 이 이념적 대결은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여당과 야당이 싸우는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여당이 찬성하면 야당이 반대합니다. 야당이 찬성하면 여당이 반대합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노사 간의 대결이 커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대결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또 교육현장은 어떻습니까? 선생과 선생들이 갈등하고 있고, 스승과 제자들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꼼수(나는 꼼수다)’라는 방송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전형적인 좌파적 성향의 방송입니다. 한편에서는 이 방송을 들으며 소리 높여 박수를 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혀를 내두르며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꼼수같은 언론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극우적 성향을 지닌 인터넷 사이트, ‘일간 베스트(일베)’가 등장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진실성이 사라진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 다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듣고, 보는 순간 ‘이것은 절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단적인 좌·우파들의 책임지지 못할 언어가 횡행하고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배설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좌파일까요, 우파일까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좌파일까요, 우파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좌파도, 우파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고, 실제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이야기가 들어오면 금방 당파성을 띄게 되고 무리가 나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여당과 야당의 비율은 강남에 사는 사람의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60대 40, 더 나아가 70대 30, 아마 그 사이일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 안에는 여도 있고, 야도 있습니다. 한쪽을 지지하면 금방 반대세력이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정치만큼의 이슈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명백히 정치적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움직이는 힘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인 현실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 선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정의의 나라, 공의의 나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새로운 시대가 이 땅에 임했다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우파, 좌파라고 하는 말은, 본래 날개 익(翼)자를 써서 우익과 좌익으로 불리던 말입니다. 즉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입니다. 새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새에게는 오른쪽 날개가 있고, 왼쪽 날개가 있습니다. 만약 오른쪽 날개가 새에게 오른쪽으로만 가자고 하고, 왼쪽 날개가 왼쪽으로만 가자고 하면 그 새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서로 싸운다면, 그것은 날 수 있는 새가 아닐 것입니다.

새가 날기 위해서 어디에 힘이 실려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움직이는 힘은 몸통에 있습니다. 즉 새에게는 몸통이 중심입니다. 날개가 몸통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몸통이 양 날개에 힘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적절하게 쓸 때 새는 날 수 있습니다.

왼쪽 날개 자르고, 오른쪽 날개 자르면 그 새는 무엇이 될까요? 그것은 더 이상 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뒤뚱거리며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존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중심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즉, 몸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양 날개가 힘을 얻고 비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이 무엇일까요? 자유와 민주입니다. 공의와 정의입니다.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좌나 우로 극단적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에는 분쟁과 싸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더 근본적인 중심에 서서 필요하면 좌와 대결하고, 때로는 좌를 끌어안고, 필요하면 우와 대결하고 때로는 우를 끌어안으면서 가야 할 목표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자유 대한민국, 민주주의 대한민국,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자유와 민주로 통일되는 이 나라에서 참된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목표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 땅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민주의 축복을 누리며, 공의와 정의가 만드는 평화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며 삶의 현장에 나가야 합니다. 이 사회가 진리를 바라볼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다원주의적 사고입니다. 다원주의적 사고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치관을 결정할 때 오직 실용성과 편의성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되는가? 내가 그것을 하면 편안한가?’라는 편의주의 사고 속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계는 점점 천박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사모와 물음이 사라지고, 올바른 가치관에 자기 삶을 투자하는 일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한 가치관이 상실되고, 다함께 인정할 수 있는 공동선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관인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 시대적인 조류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적 투명성의 재고와 인격을 소중히 여기는 일, 그리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더욱 애를 써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그 일들을 감당할 때, 이 시대의 분위기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신앙을 지닌 성도들은 사회 변화와 변혁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899년 3월1일에 발행된 『대한그리스도인 회보』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많은 고을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백성들이 재물을 빼앗기고 고통 받는 부정부패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는 글입니다. 당시 장로교, 감리교인들은 합해서 기껏해야 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115년 전인 그 때에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1,5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인의 수는 전체 국민의 0.1%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적은 수의 사람들이 삶을 계획하고 시대를 바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체 국민의 20%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경제, 금융인들과 기업가들은 어떻게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까? 교육자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 인권이 살아나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쓰임 받고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신앙이란 우리의 삶을 도외시하는 최면제가 아닙니다. 마취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문제와 위기를 더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며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뀌어야 할 것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변화시키고 더 성숙하고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기초입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다니엘은 자기 민족이 멸망당하는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 인물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의 세월을 노예처럼 살아가는 자기 민족을 통탄스럽게 지켜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의 생활이 종식됨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바로 다니엘서 9장에 나오는 긴 기도문이 자기 백성의 위기를 보면서 하나님께 드린 다니엘의 기도입니다. 그는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 9:19)

내 공로와 내 뜻이 아니라 이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을 위하여 이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삶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요청받고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시대의 문제점과 아픔, 슬픔을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한다는 것은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손을 걷어붙이고, 내 발로 현장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배우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기도하면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직장인입니까? 그러면 기도하면서, 내가 있음으로 이 직장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정치인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고민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경제인이고 기업가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어떻게 함께 나눌 수 있는지 하나님께 물으며 가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권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이 중심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금방 한쪽으로 몰려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신앙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함께 기억하면서 “하나님, 내가 있음으로 내 가정이 복 받고, 내 직장과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지는 축복의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월 한 달, 우리의 조국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 어떤 문제와 아픔이 있는지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마음에 순종하여 모두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니엘 9장 주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다니엘

다니엘 9:1-27

요절: 다니엘 9:18 /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다니엘서 9장은 갈대아 나라 다리오왕 원년에 다니엘이 하나님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내용과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응답받는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용사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니엘의 기도(1-19)

1절을 보십시오. 메대 족속 아하수에르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이었습니다. 또한 2a를 보면 '곧 그 통치 원년' 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년수를 정확히 기록하는 이유는 바벧론제국이 멸망하고 유다가 해방될 역사적인 때가 임박하였음을 나타냅니다. 이 때 다니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b를 보십시오. 그는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습니다. 이는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5:9-11절을 보면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벧론왕을 섬기리라"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성경공부를 통하여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현재 다니엘의 나이로 보나 사회적, 예언자적 위치로 볼 때 성경공부를 계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80세가 넘는 고령에다 대 제국의 국무총리로서 그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는 서류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 몹시 바빴을 것입니다. 이런 중에 책상에 조용히 앉아서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특별한 영적 소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나이에 관계없이 세상 일이 많으면 많을 수록 기도시간과 성경공부 시간을 절대적으로 확보하였습니다. 그는 성경공부를 의무적으로, 목자의 체면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위하여 절대적이고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온 마음과 힘과 생명을 다하여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그는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었으며 화려해 보이는 세상에 조금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적인 눈이 흐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끝까지 섬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해방을 갈망하였지만 그 년수를 깨달은 사람은 성경공부를 하던 다니엘뿐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성경공부를 통해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그는 위대한 기도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정보시대로서 각종 정보들이 홍수와 같이 쏟아져 나옵니다. 의학지식만해도 오늘날은 10년전에 비해 세배의 양을 공부해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에 대해서는 많이 압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므로 영적 세계는 문외한입니다. 이로써 영성은 점점 피폐해져 사람들은 기계의 부속품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육의 양식이 필요하듯이 영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성경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두신 계획을 알았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필사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첫째,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는 기도였습니다.(3-15)

3절을 보십시오. 그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기도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이나 국가적인 재난이 있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금식'은 육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한 가지 기도제목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는 것입니다.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쓴다는 것은 죄인으로서 무력함을 느끼고 겸비하게 하나님께 기도함을 말해줍니다. 다니엘은 죄악된 백성들을 대신하여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 잘 알았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와 자기 백성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다니엘은 지금까지 하나님앞에서 뜻을 정하고 죄악된 이방문화가운데서도 하나님 한 분만 경외하고 섬기므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도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죄를 자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회개하는 데 자기를 제외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 중 한 사람같이 죄인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의 자세로 나아가 기도할 때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습니다.(시 51:17) 진실되고 의롭게 살고자 애를 쓸수록 하나님앞에서는 비참한 죄인임을 깨달을 뿐입니다. 다니엘은 신앙의 경륜이 쌓이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수록 자신과 자기 백성의 죄가 얼마나 크고 비참한 가를 알고 하나님께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회개한 죄가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죄에서 돌이키시고자 주의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마저도 듣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를 볼떠 이들의 죄는 고의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 백성이 근본적으로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앞에 이 죄문제를 들고 나가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고 목자를 피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본성대로 자기가 원하는 데로 살고자 하는 마음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게 되면 말씀앞에서 회개해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그렇게 하다가는 세상에서 낙오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씀을 떠나는 순간부터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데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침판 잃은 배와 같이 방황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며 결국 우상 숭배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말씀공부를 멀리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목자를 멀리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 같지만 실상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는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우리는 죄의 소욕을 이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다니엘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100% 공의로우시며 자기들이 이렇게 수욕을 받는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70년 동안 수욕을 당하게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편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재앙이 자기들의 죄때문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였습니다. 11절에서 15절 까지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도 모세의 율법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선민이라고 해서 봐주시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범죄하면 저주하시고 순종하면 복을 내리십니다. 이 하나님은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14) 다니엘은 이 하나님앞에서 죄를 합리화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자복함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하면 징계하시지만 죄를 자복하고 진실되게 회개하면 어떤 몹쓸 죄인이라도 받아 주시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요한일서 1:9절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16,17)

16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그의 첫째 기도제목은 마땅히 때가 되었으니 포로생활에서 벗어나도록 해달라고 간구해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조건개선보다 하나님의 분노를 떠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개선을 더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자기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므로 하나님의 분노를 샀기 때문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건 개선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개선이 더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 자체를 구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성소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습니다. 모세도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 절을 하므로 십계명 가운데 제 1, 제 2계명을 범하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진노하사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약속대로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시고 그 땅을 이들에게 줄 것이로되 하나님 자신은 범죄한 이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는 슬퍼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만민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33:15,16) 모세는 하나님 없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것 보다 하나님과 함께 광야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편히 산다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지옥이요,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천국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개선보다 조건 개선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보다 세상 물질, 명예, 권세를 얻기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훌륭한 동역자, 신실한 양 , 좋은 직장, 좋은 학점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관계성이 좋지 않고 하나님을 얻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분노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얼굴빛이 주의 황폐한 성소에 계속 비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목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5절에서는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17절에서는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도록 기도합니다. 18절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시도록 합니다.19절에서는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는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자기들이 포로가 되어 수욕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그 사실보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시며 그런 기도는 아주 잘 들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제목이 무엇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기도를 하는 내적 동기와 소원입니다. 같은 기도제목이라도 자기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는 그 결과에 있어서 아주 다릅니다. 양을 fishing하고 1:1을 하는 것도 목자의 체면이나 목자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하면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됩니다. 양을 회개시킬때도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하면 회개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회개시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가운데 역사하셔서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심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하였습니다.(18,19)

18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다니엘은 지금까지 절대적인 믿음으로 살았고 이방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자기의 업적이나 의를 기초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봐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큰 긍휼만을 의지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의 의는 하나님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의롭게 살 수 있었던 것도 자기의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하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했기 때문에 사랑받을 만하고 하나님께 당연히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무가치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들고 나와서 요구하는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다만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할 때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눅18:9-14)

19절을 보십시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간절하였으며 자기 백성으로 향한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는 중보자로서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으며 또한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기뻐하시고 즉시 응답하십니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20-27)

하나님은 다니엘이 자기와 자기 백성의 죄를 자복하며 간구할 때 천사 가브리엘을 빨리 보내셨습니다. 23절을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하나님이 가브리엘을 바로 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수하게 양들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면 결코 지체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기도에 대한 불신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약 4:3) 그러나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은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요1 5:14)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려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찌니라" 천사가 그에게 온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회복될 인류 구속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속자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뭇별과 같은 많은 자손을 주시고 또 그들을 통해 이루실 600년 앞의 구속역사를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신실한 양 한 사람을 위하여, 훌륭한 동역자를 위하여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이루실 원대한 구속 역사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십니다.(엡 3:20) 24절을 보십시오. "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가운데는 70이레의 기간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실 은혜의 역사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째로, 이스라엘의 허물이 마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범죄의 역사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가 끝납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죄는 인류위에 왕노릇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죄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죄가 더이상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죄악이 영속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속하여 주시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을 말합니다. 넷째로, 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를 사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3:25,26절은 말합니다.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 이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다섯째로, 이상과 예언이 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시고 이상중에 계시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므로 이 모든 이상과 예언이 응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시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 모든 구속 역사를 일일이 다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70이레는 문자적으로 490일이지만 비유적으로는 1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490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성을 중건하는데서 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나아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전 기간을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은 네 단계로 나뉘어집니다. 첫째, 일곱이레; 둘째, 62이레; 셋째, 중간 공백기; 넷째, 마지막 한 이레입니다.

일곱이레는 유대인들이 바벧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는 B.C538년 고레스 원년에서, 왕의 칙령으로 바벧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아래 제 2 성전인 스룹 바벧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할 때(B.C445년) 까지를 가리킵니다. 육십이 이레는 예루살렘 성전이 수축된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시기전 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 역사상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편에서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속 역사를 준비하는 의미있는 기간이었습니다. 중간 공백기는 그리스도 성육신부터 적그리스도의 출현 직전까지를 말합니다. 26절에서 육십이 이레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끊어짐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이레는 세계 역사의 종말의 시기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게 될 7년 대 환란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때는 적그리스도의 활동기로서 전반부 3년 반 동안은 성도와 굳은 언약을 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할 것입니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나면 적그리스도는 자기 정체를 드러내서 모든 언약을 파기하고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예배하게 하고 666의 숫자가 있는 짐승의 표를 받게 하며 이를 거절한 자들은 죽일 것입니다. (계 13:15-18) 그러나 이 기간은 잠시뿐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적그리스도들은 심판당하여 영원한 유황불 못에 던져져 멸망하게 됩니다.(계 19:20) 지금까지 성도들은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며 괴롭히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내적으로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고생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원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기도는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임을 배웠습니다. 이 시대는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만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되게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봄학기에 우리 가운데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종들이 많이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긍휼로 인하여

단 9:18 /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니엘 9장 말씀입니다. 다니엘 9장 18절 말씀입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저는 오늘 “긍휼로 인하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그 동안 다니엘서의 환상을 살펴보면서, 성경공부의 형식으로 진행을 하였는데, 오늘은 설교시간으로 진행을 하고, 다음 주에 다시 성경공부 형식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긍휼로 인하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누리고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의 긍휼하심일 것입니다.

주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은 끝이 없도다.

바로 이 예레미야 애가 3장 22절 말씀처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끝이 없는, 주의 긍휼로 말미암아, 오늘도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살아 숨쉬며,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라는 말은 “라함”(racham)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또 다른 의미로 “어머니의 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어머니의 태속에서 생명을 받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다 주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살아있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긍휼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긍휼하심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 당시 상황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서 9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메대 사람들의 씨에 속한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사람들의 영토를 다스릴 왕으로 세워진 첫 해

2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책들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닫되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는 것을 깨달으니라.

다니엘서 9장 말씀은 바빌론이 멸망하고, 메대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이 갈대아 영토를 다스리게 된 첫 해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하수에로”라는 말은 이집트의 “파라오”라는 말처럼, 페르시아 왕을 부르는 히브리어 호칭입니다. 페르시아어로는 “흐샤야르샤”라고 불렀고, 그리스어로는 “크세르크스”라고 불렀습니다. 다니엘서 5장 31절에서는 이때 다리오 왕의 나이가 62세 가량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리오는 메대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페르시아의 왕, 즉 아하수에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는 자신의 조카인 페르시아 왕 고레스로부터 갈대아 사람들의 영토, 즉 바빌론 지방을 분할 받아 다스릴 왕으로 세워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니엘서 9장 2절 말씀을 보게 되면, 다리오의 통치 제1년에, 다니엘이 책들을 통하여 주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그 햇수, 바로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는 기간이 70년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언과 성취에 대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성경공부의 형식으로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므로, 오늘은 한 구절만 함께 보시겠습니다. 우리 함께 예레미야서 25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찰 때에 내가 바빌론 왕과 그 민족과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그들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리라.

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70년의 기간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바로 70년이 찰 그 때에, 바빌론 왕과 그 민족과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다니엘은 바빌론 왕이었던 벨사살 왕의 최후를 직접 목격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 왕이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을 목격하였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금 형상 꿈에서, 금 머리 다음인 은으로 된 가슴과 두 팔에 대하여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네 짐승의 환상에서, 한 쪽에서 몸을 일으킨 곰을 기억하였을 것이며, 두 뿔 가진 숫양에 대하여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70년의 기간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고, 그 햇수를 마침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될 수 있는, 그 예언의 시간, 약속의 시간이 참으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 다니엘의 상태

이 때 다니엘의 나이는 80세 이상, 거의 90세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린 소년일 때,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왔고, 이제 거의 70년이 채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매우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들을 펴놓고, 예레미야서 말씀을 읽고 공부하며, 새롭고 신선한 깨달음을 얻었던 열정적인 성경연구가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연세 드신 우리 부친님, 모친님들께서 많이 앉아계신데, 정말 다니엘과 같이 열정적인 모습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니엘에게 깨달음을 주셨고, 이제 곧 예레미야의 말씀들이 성취될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성경말씀을 향한 열정과 깨달음을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 깨달음을 주실 때, 새로운 꿈이나 환상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아직 성경말씀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말씀을 받을 때에는, 꿈과 환상을 통해 받았지만, 이미 계시되고 기록된 말씀에 대해서는, 이미 그가 가지고 있던 성경 기록을 통하여, 깨달음을 받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이 부지런히 말씀을 찾고, 책들을 펴지 않았다면,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평생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깨달음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날마다 평생토록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붙들기를 원합니다.

** 다니엘의 기도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서 9장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내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주 하나님을 향하여 내 얼굴을 고정하고 기도와 간구로 구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대언자 다니엘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70년의 기간이 다 채워졌고,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기 직전까지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니엘은 기도하며 간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깨닫고, 참되게 받았던 믿음의 사람 다니엘이 한 일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은, 바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며, 응답하는 것이며,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으로 인해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는데,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던 다니엘은 절대로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오고, 또 말씀을 통해 기도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 말씀을 근거로(1)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의 기도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의 내용이 4절부터 19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 읽어가면서 살펴보지는 않겠고, 몇 가지 요점을 잡아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요점을 찾아볼 수가 있겠지만, 오늘은 4가지 요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요점은 다니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함께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주 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백하며 이르기를, 오 주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여기에서 우리는 다니엘이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의 시작부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먼저 내 하나님께, 다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닌, 바로 나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백하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다니엘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기도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여기에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지금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그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즉시로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우리에게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그리고 해외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일 때마다, 주님께서 임재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을 작품으로 만드셨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만드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대로 우리 자녀들이 자라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걸 작품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들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다니엘도 그렇게 주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 주의 이름을 위하여(2)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서 9장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러하온즉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두 번째 요점은 다니엘의 기도가 주를 위하여 드린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자기의 욕심이나,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 17절의 말씀은 거의 기도가 마무리되는 부분인데, 여기에서 다니엘은 주를 위하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시며, 성전을 회복시켜주셔서, 주의 얼굴의 빛이 주의 성소를 비추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 앞 절인 16절에서도 주의 모든 의에 따라 분노와 격노를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8절의 중간 부분을 보시면,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니엘의 고향이기 이전에,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도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기도하고 있고,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시편 23편 말씀에서도 다윗은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들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도하셨던 이유는, 다윗의 이름이 영광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이유도, 다윗이 만군의 주의 이름,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였을 때에도,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쌍하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주가 그들을 인도할 능력이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주의 이름이 모독을 받지 않겠습니까?”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첫 번째 요점처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라면, 그리고 두 번째 요점처럼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기도라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기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릎을 꿇을 때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기도로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된 마음(3)

이제 우리 함께 다니엘서 9장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훈계와 주의 판단의 법도를 버리고 떠남으로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며 사악하게 행하고 반역하였나이다.

세 번째 요점은 바로 다니엘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읽은 다니엘서 9장 3절에서는 다니엘이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백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읽은 5절에서는 “우리가” 주의 훈계와 주의 판단의 법도를 버리고 떠남으로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며 사악하게 행하고 반역하였다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다니엘은 언제 주의 훈계를 버렸으며, 언제 주의 판단의 법도를 버렸으며, 언제 주님을 떠나 죄를 지었을까요? 다니엘이 과연 언제 불법을 행하며 사악하게 행하고 반역하였을까요? 물론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다니엘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러한 죄의 내용은, 과거에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즉 다니엘의 조상들이 범하였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니엘은 마치 자기 자신의 죄를 지은 것처럼, 나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기도하면서, 자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거룩하고 의로웠는데, 그들이 잘못한 것이니, 이제는 저에게는 기회를 주시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반역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 말씀도 눈으로 보시면, 역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도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고 있고, 9절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도 “우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고, 11절 끝부분에서도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도 “우리가” 이 모든 재앙이 일어난 후에도 기도하지 않았다고 자백하고 있고, 14절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끝에서도 이제 “우리는” 죄를 지었고 사악하게 행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도 중에 다니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과 형제들과 완전히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단지 70년이라는 햇수만 깨달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깨달았고,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세리 옆에서 기도를 하면서, 내가 이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세리와 자신을 분리시키고는 우쭐대고 감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전쟁 중에 있던 사울 왕은 백성들을 굶게 만들고, 나중에 전쟁 후에 백성들이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짐승들을 피 째 잡아먹었을 때, 그것이 자기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죄를 지었도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기에서 이 모든 죄와 불법 속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켜,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분리되지 않은, 하나 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 백성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백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도 이러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안 그런데 저 형제는 왜 저러냐, 나는 부족해도 저 정도는 아닌데, 저 자매는 너무 심하다, 저 지체는 왜 이렇게 문제냐, 하고 나 자신을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내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내 자매의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어, 하나 되고 일치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며, 같은 심정으로,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니엘처럼, 모세도 그런 기도를 하였고, 사도 바울도 그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모세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주의 책에서 지워버리시라고 기도하였고, 사도 바울은 차라리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감싸 안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것이 하나도 없으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친히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이러한 기도를 우리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 겸손히 긍휼을 구함(4)

이제 우리 함께 처음에 읽었던 다니엘서 9장 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마지막 네 번째 요점은 바로 긍휼로 인하여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긍휼 아니면, 우리는 설 수 없고,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앉으신 그 왕좌의 이름이 바로 긍휼의 자리이며, 은혜의 왕좌인 것을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로 인하여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긍휼로 인하여 담대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 4절 말씀에서도,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고백하였습니다. 9절 말씀에서도 우리는 반역하였지만, 주님께는 긍휼과 용서가 속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는 주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찬양과 섬김과 드림 또한 주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음이 주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요즘 저희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부르는 찬양이 있는데, 바로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주인공은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 바로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평생을 구걸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베드로를 통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걷고 뛰면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아이들과 이 찬양을 신나게 함께 부르면서, 제 마음도 기쁘고, 크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한 번도 걷지 못하던 이 사람은 평생 처음으로 걸어보고 뛰어보면서 감격의 찬양을 드렸는데,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우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걷고 뛸 수 있었던 나는 얼마나 감격스럽게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말 못하는 자가 입이 열리면서 주님을 찬양한 기록, 앞을 못 보던 자가 눈이 열리면서 주님을 경배한 기록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말하면서 살아왔던 나는 과연 얼마나 그것을 감격스럽게 여기며, 찬양하였던가, 늘 긍휼로 인하여 살면서도, 그것을 참 모르고 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찾고, 구하고, 보고, 들은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앞을 볼 자격도, 무엇인가를 들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살아왔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을 보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보면, 우리는 손과 발을 가질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숨을 쉬며 살아갈 자격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구와 기도로 구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주님의 크신 긍휼로 인함인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 응답은 즉시

이제 우리 함께 마지막으로 다니엘서 9장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 간구가 시작될 때에 명령이 나왔으므로 내가 네게 알리려고 왔노라. 너는 크게 사랑받는 자니 그런즉 그 일을 깨닫고 그 환상을 깊이 생각할지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나타나서 전해주는 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23절 말씀을 잘 보시면, 다니엘의 기도가 언제 응답되었는가를 알 수가 있는데, 그 때는 바로, 다니엘의 간구가 시작될 때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간구가 시작될 때에 명령이 나왔으므로, 그 즉시로 가브리엘이 출발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기도를 끝까지 다 들어보시고, 마음이 흡족하셔서, 천사를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이 이미 주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마음이 아파서, 애통하며, 자백하며, 통회하며, 또 소망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 즉시 그를 크게 사랑하시며, 그를 긍휼히 여기시며,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잘했기 때문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서 기도를 잘했기 때문에, 합격점을 받아서 천사가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오직 주님의 긍휼로 인하여 된 것이었습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긍휼로 인하여”라는 제목으로 다니엘서 9장에 나타난 다니엘의 기도와 주님의 응답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이 본문으로 설교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설교 제목이 “내 기도가 주 앞에 향처럼 놓이게 하소서.”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다니엘의 기도를 처음 보게 되었고, 저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우리 집에 도둑이 들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매일 밤 했고,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나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축구를 할 때는 “축구 꼭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기도라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다니엘의 기도를 보면서, 내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고 비천하고 못나고 어리석은 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헌신에 대한 설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저의 일생을 드리겠노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나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겠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제가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는데, 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드리겠다고 했으면서,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못난 발걸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한 것은, 저의 못나고 보잘 것 없는 삶 가운데, 주님의 긍휼이 너무나 가득 넘치고 풍성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계속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잠시 바빌론을 통하여 벌 주셨지만, 다시 회복시킬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즉시 응답의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의 크고 넘치는 긍휼로 인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긍휼의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다니엘)

단 9:19

다니엘의 미해결 과제

오늘 설교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교회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꼭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인물, 곧 자신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어떤 모델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은 공부를 매우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다니엘 당시 바벨론 제국은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 한 후 각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만 선발해서 국가의 지원으로 바벨론에서 조기 유학을 시켰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식민지였던 유대인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바벨론에서 조기유학을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1장은 그렇게 각 지역에서 최고로 머리 좋다고 하여 뽑혀온 사람들 사이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가장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반에서 1등하는 것도 쉽지 않고,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데, 다니엘은 유대 나라 전국에서 1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수제들이 모인 바벨론 황제 직속의 최고 명문학교에서 전 세계 1등을 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녀를 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학생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또한, 다니엘은 공부도 잘하면서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흔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공부한다고 주일 예배도 빠지고, 신앙생활은 뒷전인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다니엘은 늘 학교 공부에서 1등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했던 학생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성경을 읽으라고 큐티를 하라고 기도하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데, 다니엘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같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잖아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장면도 등장해요.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왕이 주는 음식까지도 거절하지요. 그러니 우리 자녀들도 다니엘과 같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예쁘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먼저 공부를 잘했어요. 신앙생활도 참 잘합니다. 거기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까지도 참 좋아요. 다니엘의 세 친구,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친구는 다니엘보다 공부를 쪼~~ 끔 못해서 전 세계에서 2등, 3등, 4등합니다. 1등은 다니엘이지요.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다니엘이 중요한 신앙의 기로점에 서 있을 때 다니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는 친구였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만나러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친구는 한 사람도 안보여요. 그러니 우리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이 공부도 잘하고 믿음도 좋은 최고의 친구들과 늘 교제하고 사귄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모든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닮기를 원하는 모델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청소년 시기, 청년 시기, 나아가 장년의 시기를 보냈던 다니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그 앞에 있는 모든 문제가 하나도 남김이 없이 해결되었을까요?

사실 다니엘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문제 해결사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다니엘 앞에서는 너무도 쉽게 해결되곤 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다니엘 이전에 눈의 띄는 문제 해결사는 단연코 요셉이었던 것 같아요.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 요셉이지요.

예를 들어, 당시 전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바로가 하루는 꿈을 꿉니다. 살진 소 일곱이 등장하였다가 그 뒤에 여윈 소 일곱이 나타나서 살진 소 일곱을 모두 먹어버리는 꿈이었지요. 바로가 곧 이어 또 하나의 꿈을 꿉니다. 매우 충실하고 풍성한 일곱 이삭이 나왔는데 그 뒤에 아주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타나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꿈이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모든 지식인들 박사들이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 꿈을 해석하죠? 바로 요셉입니다. 바로의 그 꿈은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예고한 꿈이라는 사실을 요셉이 해석해내요.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요셉은 7년 풍년 뒤에 올 7년 흉년을 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그 방법으로 각 지역에 감독관을 세워 7년 풍년의 기간에 소출의 1/5을 바로의 이름으로 각 성에 쌓아 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확한 해석이요 탁월한 해법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보여주었던 요셉의 탁월한 실력이 인정을 받아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설교의 주인공 다니엘은 바로 그 요셉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죠. 그런데 꿈을 꾼 사람이 말이 없어요. 자신이 어떠한 꿈을 꾸었는지를 맞추고, 그에 대한 해석도 내어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옛날 요셉은 그래도 바로의 꿈을 듣기는 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왕이 꿈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맞추고, 그 꿈의 해석도 내어 놓아라고 명령합니다. 아니, 어젯 밤에 내가 꾸었던 꿈도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력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옆집 사람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이 어려운 문제를 누가 맞추지요? 다니엘이 맞추는 거에요. 여러분, 이처럼 다니엘은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데 달인이었어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릴께요. 다니엘은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척척 해결을 하는 사람이니 그의 앞에는 어떠한 문제든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해결되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떠한 문제든 그것을 놓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 문제가 그 즉시 다 해결되었을까요?

다니엘은 학생 시절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어도 그 문제의 정답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사람이었어요. 다니엘은 성인이 되어 바벨론 제국의 관료가 되어 다양한 제국의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작 그 마음에 있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 다니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어요.

다니엘의 청소년 시절, 다니엘의 학창시절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라도 다니엘에게는 답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가?”

질문을 바꿔볼까요?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거에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아무리 전 세계에서 1등을 해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 답을 찾으려는 하나의 몸부림이 바벨론 황제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는 장면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다니엘이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당시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던 바벨론 제국의 고위 관료로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질문, “나는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가?” 곧,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미결과제로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 풀리지 않았던 문제는 다니엘 개인의 문제를 넘어 자기 민족 유대인에 대한 질문으로 확대되지요. 그 질문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우리 민족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 제국에 멸망하였는가?”

이 질문도 다시 풀어볼까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무리 공부를 하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제 아무리 기도하여도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다니엘의 겉모습만 바라보면, 그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니엘은 어떤 문제든 열심히 기도하면 다 해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지요. 다니엘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제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보니 모든 문제가 척척 해결되던가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도 우리 앞에는 언제나 남모르는 아픔과 숙제와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고요.

우리 주변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하고 늘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만사가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요. 그러서 우리는 더욱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바로 바로 응답도 받고 만사가 형통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니 내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나? 나의 기도가 부족한가? 내가 무엇인가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있는가? 계속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무런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어보이는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그에게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네~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사람은 없어요.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제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어도 척척 해답을 내놓았던 다니엘 조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에게 ‘집사님, 기도하시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그 문제 해결하신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세요. 그 집사님께서 기도하게 계십니다. 그토록 마음이 아프고 힘든데 왜 기도를 안하겠어요. 기도를 안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요,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기도생활이나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다고 너무 생각하실 필요도 없어요. 오늘과 같은 휴일에 수요예배까지 나와서 예배하는 여러분들이면 여러분은 충분히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침내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

그러면 이제 궁금해지죠? 아니, 다니엘과 같이 믿음이 좋고 실력도 있고 신실한 사람이 왜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나아가 자기 민족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이 뜻을 묻는 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에 그토록 오래도록 침묵하셨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하고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데 왜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미해결과제가 남아 있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니엘이 그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문제를 해결받는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 (단 9:1)

여기에 다니엘 9장의 시간적 배경을 명확하게 표시해 놓고 있지요. 다니엘은 10대 청소년 시절에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온 것을 제 1차 바벨론 포로의 때라고 생각한다면 –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죠 – 지금 다니엘 9장 1절이 묘사하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 첫해는 다니엘이 다니엘이 유대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이주한지 약 6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었습니다. 그 60년 동안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질문, 곧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 자신의 문제를 넘어 민족의 문제로 바꾸어 본다면, “과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치열하게 씨름하였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자그마치 60년입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다니엘 9장 2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단 9:2)

다니엘의 눈에 드디어 예레미야 선지자의 편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예레미야 29장에서 여전히 유대땅에 머물러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 나와요. 다니엘이 60여년동안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였는데, 바로 이 시점에 드디어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자신이 한 평생 풀지 못했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범죄가 창궐하여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는 사실, 포로생활 70년이 지나면 그들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요, 예루살렘에 참된 회복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이미 계획해 놓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했던 다니엘은 그저 기도하면서 답답해 했던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60년 전에 알려주셨으니 다니엘에게 10대 시절부터 알려주시면 좋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바벨론에서의 포로 기간이 70년이 거의 되어가는 시점, 곧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건너온 지 약 6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 아무리 기도하고,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하고,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나의 삶 속에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왜 그 60여년의 세월 동안 다니엘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다니엘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70년의 세월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왜 이렇게 단기적인 응답을 추구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오늘 기도하여 내일 응답받기를 기대합니다. 이번주에 기도하면 다음주에 응답 받기를 원하고요, 이번달에 기도하면 다음달에 응답받기를 원해요. 아무리 늦어도 올해 기도하면 내년에는 응답이 되기를 기대해요. 이러한 우리의 조급한 기도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다니엘의 기도를 생각할 때 너무도 초라한 기도가 아닐까요?

적어도 10년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적어도 2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기도가 지금 당장의 기도 응답에 붙잡혀 있기보다는 다니엘의 기도와 같이 60년, 아니 한 평생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끊임 없이 기도하는 보다 넉넉한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족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은 6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 와서 공부를 해야 했는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이 왜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해야 했는지, 나아가 하나님은 다니엘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계획을 갖고 계신지 기도하는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지요.

이제 다니엘은 다시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다니엘 9장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다니엘에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을 소개해주고 있어요.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은 오늘 본문 9장 19절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60여 년을 기도한 뒤, 다니엘은 드디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을 통해 유대인들을 새롭게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보니, 이제 70년이 거의 차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니엘은 뜨겁게 기도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주여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시해하여 주십시오.’

‘곧, 주님의 성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주님의 택함을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사람들이오니, 주님의 계획과 같이 70년의 포로생활 이후 저 예루사렘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간절히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 유명한 다니엘의 세 이레 기도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다니엘의 세 이레 기도는 놀랍게 응답을 받습니다. 아니, 다니엘이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쯤 이미 하나님은 응답을 예비해주고 계셨어요. 그 내용이 다니엘서 9장 뒷부분부터 10장에 이르기까지 등장해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니엘이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는데 다니엘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금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공동체를 재건하는 그 일에 다니엘이 동참할 수 있었습니까?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대열에 함께 했을까요? 구약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오지 못한 것 같아요. 다니엘이 기도했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도 받았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회복되었지요. 그러나 그 모든 일은 다니엘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니라 스룹바벨과 예수아라는 또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의 역사를 이끌었고 광야 40년 동안 참으로 기도하며 고난 가운데 인내하였던 모세에게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요. 그렇다고 모세의 충성과 모세의 기도가 헛된 것이 결코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다니엘의 기도는 응답 받았어요. 그러나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일이지 다니엘의 역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었기에 60여년 동안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신이 직접 앞장설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비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한 평생 붙잡고 기도하였던 기도의 핵심 내용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자기 민족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내가 주도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기독교의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욕구를 관철시키는 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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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3 / 단 9:16-19 / 이스라엘 회복을 간구함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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